좋은이야기

[스크랩] 23-김해김씨경파의지파인참판공파.후손우의정등지내신충정공.이조와고려의군과공?.좌은김우황.경종께서1723년시호忠靖公.지파명별칭?.김주성23.

나오리오 2011. 9. 29. 17:43


갑봉(甲峰)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신 김우항(金宇杭) 선조님의 호(號)이며 갑봉파(甲峰派)란 갑봉(甲峰) 우항(宇杭) 선조님 이하 자손들을 말합니다. 정식 지파명은 충정공 휘우항파며 갑봉파는 별명(칭)입니다.

갑봉 선조님은 금녕군 휘목경파(金寧君 諱牧卿派) 14세(世)이며 지파(支派)로는 참판공 휘영견파(參判公 諱永堅派)입니다. 갑봉(甲峰)선조님은 조선조에 도승지를 비롯하여, 예조·이조참판, 대사헌, 형조·병조·이조판서, 좌참찬, 우의정 등을 지내셨는데 김해김씨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조에 정승(政丞) 반열에 오르신 분입니다.


###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1.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파 = 경파

중시조 목경은 고려 충혜왕때 문과급제하시어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시고 금녕군에 봉해지셨다.
2세 보(普)는 고려 공민왕때 좌시중을 지내셨으며 금녕부원군에 봉해지셨다.
3세 도문(到門)은 이조초기에 봉상대부(奉常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를 지내셨다.
4세 근(覲)은 이조초기에 봉상대부.호조총랑을 지내셨고 통정대부.호조참를 수증하셨다.
5세 : 효원(孝源)은 병조참의
효분(孝芬)은 세종때 정언 지제교(知製敎)를 지내셨고 가선대부.호조참판 에문관제학.동지중추관사에 추증되셨다.
6세 진손(震孫)은 세종때 통훈대부.승문원교리를 지내셨고 자헌대부.호조판서 겸 지중추관사에 추증되셨다.

※ 경파에서 분파된 파
남강공파, 문간공 저파, 문절공파, 밀직공 수파, 밀직사공 창문파, 횡성공 영서파, 안경공 영정파, 영변공파, 제학공파, 직암공파, 진국파, 생원공 인하파, 가선공파, 참판공파, 충정공파(갑봉파), 판서공파, 평장사공파, 호참공 진서파, 승지공 세준파, 봉상공 현문파, 석성공 영순파, 참봉공 근직파, 참찬공 합파, 성균진사공파, 광주공 희경파, 교리공 우안파, 진사공 덕직파, 호조참판 홍유파, 죽재공 연옥파


2. 백과 사전에서 "김우항"으로 검색하시면, 할아버님에 관한 내용이 정확히 실려 있습니다.

3. 다음은 국립중앙도서관 납본 족보 검색 내용입니다.

번호 표 제 저작자 발행자 발행년도 청구기호
1 金海金氏참判公派忠靖公(號甲峯)世譜. 1-3 金海金氏참判公派忠靖公(號甲峯)世譜所 編 金海金氏참判公派忠靖公(號甲峯)世譜所 1995 999.11-김319ㅅㅊ참-1-3

자료있는곳 구분
서고자료신청대 일반도서

4. 상기 자료로 미루어 보건데 충정공 할아버님은 김녕군파(별명; 경파, 파조;목경, 태조대왕으로부터 51세)중 참판공파(분파조; 영견, 태조대왕으로부터 57세, 이조 참판)이시며, 충정공 할아버님후손들이 1995년에 족보를 따로 발간 하신것 같습니다.

5. 일부 족보 관련 자료엔 참판공파 파조님의 2째 동생인 안경공파 분파조님의 후손으로 나와 있으나, 상기 족보건으로 보건데 충정공(갑봉파) 할아버님은 참판공파의 후손입니다.
-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 총론 세계도 5페이지에는 김영견 후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창하(호적 이름 창섭) 자료 제공 011-505-3169>

6. 충정공할아버님들의 후손들은 흔히 "갑봉파"라고도 칭합니다.
- 시호; 충정, 호; 갑봉
- 파명이 같고 파조가 다른 "충정공파"가 있습니다.
- 갑봉파는 가락중앙종친회가 인정한 148개파에 들어 있지않습니다. 경파에서 분파한 다른파도...

※ 청백리로 이름 높은 갑봉 김우항(金宇杭)


1649년(인조 27년)~1723년(경종 3년) 자는 제중(濟仲),호는 갑봉(甲峰),또는 좌은(坐隱), 김우항(金宇杭)은 청송부사 김홍경(金洪慶)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려조의 유명한 공신 금녕군의 14세 손으로 21세 때인 1669년(현종 10년)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675년 예송문제로 귀양가게 된 우암 송시열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681년 명경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조에 벼슬을 하였으나 당파싸움에 휩싸인 일이 없었고, 1689년에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러다가 장희빈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들이 대거 숙청된 이른바 기사환국(己巳還國) 때 억울하게 피해를 입게된 이상(李翔)을 구하려다 도리어 철산(鐵山)으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성격이 외유내강하여 매우 곧고 확실하며, 의(義)를 보면 목숨을 걸고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홍문관 수찬.교리.집의 등 내직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1695년 경상도 관찰사, 1696년에는 회양부사(淮陽府使), 1697년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후 다시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이 후 대사간, 대사성,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707년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었다. 1708년 형조,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1710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어 북한구관당상(북漢句管堂上) 을 겸임하면서 산성(山城)을 쌓고 궁궐을 축조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71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1721년 영중추부사 에 올랐다.
그가 출세하기 전에 휘릉별검을 지낸 일이 있었는데 당시 휘릉참봉 권씨는 너무 가난해서 50세가 넘도록 장가를 못든 노총각이 있었다고한다.
하루는 권참봉이 능 경내에서 나무를 하는 나무꾼을 잡아 데리고 왔는데, 이를 본 그는, 그 나무꾼이 빈곤한 살림에 70세의 노모를 모시고 여동생까지 부양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몰래 나무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무꾼을 풀어주고 권참봉과 나무꾼의 누이동생을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그 후 권참봉은 두 아들을 낳아 둘 다 진사시에 급제하는 영광을 얻었다. 어느날 김우항이 감사가 되어 권참봉댁에 들렀더니,권참봉의 늙은 장모가 후원에다 칠성단을 차려놓고 '갑봉어른 정승 되소서' 하며 간절히 빌고 있더라는 일화가 있다.
그는 또한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으니 가정형편이 매우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 5형제와 딸 셋을 두었는데 맏딸이 혼기가 되어 정혼을 하였으나 혼수 마련이 어려울만큼 청빈한 생활을 하여 세인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경종 3년(1723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충정(忠靖)" 의 시호를 내렸으며, 지금은 갈수없는 북녘땅 경기도 장단에 예장하였다.
저서로는 [갑봉집(甲峰集)] 이 있다.

건강과 행복이 영원히 함께 하시길.................

갑봉파(甲峰派)의 세계(世系)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 2세 보(普), 3세 도문(到門), 4세 근(覲), 5세 효분(孝芬), 6세 진손(震孫), 7세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 횡성현감(橫城縣監) 영서(永瑞),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 석성현감(石城縣監) 영순(永純).

7세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 8세 세홍(世弘). 9세 광수(光壽), 10세 희우(希禹), 11세 계자(系子) 진선(盡善), 12세 덕승(德承), 13세 홍경(洪慶), 14세 우량(宇樑), 우항(宇杭=갑봉)

7세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 8세 세권(世權), 9세 이수(이壽), 10세 희익(希益), 11세 진성(盡性), 진기(盡己), 진선(盡善)-계삼종숙희우후(系三從叔希禹后)

즉 안경공(安敬公) 후손인 휘진선(諱盡善)께서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의 후손인 휘희우(諱希禹)의 뒤를 이었으므로 사실상 갑봉파(甲峰派)는 안경공(安敬公)의 후손(後孫)이라 하겠습니다.

 

http://kimheakim.com.ne.kr/ -자세한 문의 사항은 클릭하여 문의해보세요

 

 

----------------------------

 

 

 글보기
이름 김명숙
제목 김해김씨갑봉파란????
저희 어머니께서 김해김씨 갑봉파라하씨는데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 글을 올림니다
할아버지 김순보
아버지 김흥섭
아들 김제권
손 김정훈
순 ..흥...제..정 .. 이렇게 돌림을 쓰고 있는데 다음돌림은 무엇인지도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 명숙님! 김해김씨족보 홈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혈통(血統)에 있어서 파(派)란 한 뿌리 또는 한 조상으로부터 갈려나온 갈래라고 정의되고, 파(派)는 그 속에 모든 자손들이 포함되어 있는 집합명사입니다.

김해김씨 갑봉파(甲峰派)란 갑봉(甲峰)아라는 호(號)를 가진신 분의 자손들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어른들은 훌륭한 선조(先祖)님 후손이기를 바라거나 후손인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막연히 경파(京派)다, 삼현파(三賢派)다, 갑봉파(甲峰派)다 라고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갑봉(甲峰)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신 김우항(金宇杭) 선조님의 호(號)이며,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卿)과 금녕군의 6세손 참판공(參判公) 휘영견(諱永堅)의 후손이므로 갑봉(甲峰)선조의 후손 역시 금녕군 휘목경파(金寧君 諱牧卿派)이자 지파인 참판공(參判公) 휘영견파(諱永堅派)가 되겠으며, 파보(派譜)의 공식명칭은 “김해김씨참판공파세보”이고, 대동보에서는 금녕군파(金寧君派)중 참판공 휘영견파(參判公諱永堅派) 등으로 수록됨으로, 갑봉파(甲峰派)라고 하는 것 보다 참판공 휘영견파(參判公諱永堅派)라고 함이 상당합니다.

김해김씨 금녕군파(金寧君派)란 중조(中祖)이신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卿) 이하 모든 자손들을 말하며 별칭으로 경파(京派)라고도 합니다. 갑봉파(甲峰派)란 조선조에서 김해김씨 중 유일한 정승(政丞)이신 휘우항(諱宇杭)의 호(號)가 갑봉(甲峰)이시기 때문에 그 이하 자손들을 갑봉파(甲峰派)라고 하고, 갑봉파(甲峰派)는 참판공(參判公) 휘영견파(諱永堅派)의 지파(支派)입니다.

갑봉(甲峰) 선조에 이르는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 2세 보(普), 3세 도문(到門), 4세 근(覲), 5세 효분(孝芬), 6세 진손(震孫), 7세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 횡성현감(橫城縣監) 영서(永瑞),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 석성현감(石城縣監) 영순(永純).

7세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 8세 세홍(世弘). 9세 광수(光壽), 10세 희우(希禹), 11세 계자(系子) 진선(盡善), 12세 덕승(德承), 13세 홍경(洪慶), 14세 우량(宇樑), 우항(宇杭=갑봉)

7세 안경공(安敬公) 영정(永貞), 8세 세권(世權), 9세 이수(이壽), 10세 희익(希益), 11세 진성(盡性), 진기(盡己), 진선(盡善)-계삼종숙희우후(系三從叔希禹后)

즉 안경공(安敬公) 후손인 휘진선(諱盡善)께서 참판공(參判公) 영견(永堅)의 후손인 휘희우(諱希禹)의 뒤를 이었으므로 사실상 갑봉파(甲峰派)는 안경공(安敬公)의 후손(後孫)이라 하겠습니다.

참판공파(參判公派)는 금녕군 휘목경파(金寧君 諱牧卿派)의 지파(支派)로서 족보(族譜)에서 세수(世數)를 별도로 표기하지 않고 중조(中祖) 금녕군(金寧君) 휘목경(諱牧卿)부터 기산(起算)하고 있습니다.

김해김씨선원대동세보(2001년 종로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西紀2001年辛巳 鍾路譜)에 의하면 참판공파를 포함한 금녕군휘목경파(金寧君諱牧卿派=경파)의 항렬자는 다음과 같이 정하여져 있습니다.

20세 顯(현)○, 21세 ○培(배), 22세鍾(종)○, 23세 ○泰(태)洙(수), 24세 榮(영)○, 25세○燮(섭)謙(겸), 26세 在(재)載(재)○, 27세○鎭(진), 28세浩(호)○, 29세 ○根(근) , 30세 性(성)炳(병)○, 31세 ○用(용)坤(곤), 32세 錫(석)鎬(호)○, 33세 ○淳(순), 34세 東(동)○, 35세○煥(환)烈(열), 36세 重(중)○, 37세 ○鎔(용)善(선), 38세洛(낙)○, 39세 ○相(상) 40세炯(형)炳(병)○ , 41세 ○基(기)奎(규)

님께서 제시한 “순 , 흥, 제, 정 자 배열의 집안에서의 돌림자는 위 항렬표 항렬자(行列字)와 일치함이 없는데 갑봉파(甲峰派)의 항렬자(行列字)를 이름자에 취(取)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현재로서는 “정” 자 다음의 집안에서의 돌림자도 알 수 없으니 집안에 보첩(譜牒)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김우항(金宇杭) 1649(인조 27)~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 자는 제중(濟仲), 호는 갑봉(甲峰). 좌은(坐隱). 아버지는 청송부사 홍경(洪慶)이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 1675(숙종 1)유생들과 더불어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8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전적·지평을 거쳐 1686년 정언이 되어 궁가(宮家)에서 저수지를 만든다는 구실로 민전(民全)을 침해하고 있음을 상소하였다.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고. 1689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였는데,일찍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된 이상(李翔)을 변호했던 일로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다시 기용되어 부수찬/수찬/부교리/교리/필선/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1696년 회양부사, 1697년 전라도관찰사 등이 역임하며 진정(賑政)을 잘 하여 칭송을 받았다.1698년 승지에 이어 1699년 대사간, 1702년 개성유수,이듬해 승문원제조·이조참판·1704년 대사헌, 이어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1706년에는 예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707년 한성부판윤이 된 뒤 형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1710년 호조판서가 되어 북한구관당상(北漢句管堂上)을 겸하며 산성의 축성과 행궁축조의 책임을 맡았다. 1712년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소론으로서 자기의 당여를 두둔하지 않고 엄정하게 사실을 규명하여 소론으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 우참찬·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16년 내의도제조(內醫都提調)·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영중추부사가 되었다.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4대신이 화를 입자 이의 부당함을 극력 주장하였으며, 또 김일경(金一鏡)의 사친추존론(私親追尊論)을 반대하다가 화를 입었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으며 사람들로부터 장자(長子)또는 완인(完人)이라 불렀다. 저서로 ≪갑봉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저작자 표시
출처 : 김주성23
글쓴이 : spinekim 원글보기
메모 :